문화재 답사/불교 문화재

경기도 여주시_02

그저 물처럼 2018. 6. 27. 21:39
반응형

신륵사에서 나오니 점심먹을 때가 되었다. 막국수가 유명하다 해서 천서리로 향한다. 약 20분을 달린 끝에 막국수집에 도착했다. 평일 임에도 사람이 엄청나다. 국수가 8,000원이라니. 나는 물막국수, 아내는 온면(별로란다). 맛은 깔끔하다.

다음에 소개할 3개의 불상은 천서리에서 막국수를 먹는다면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불상의 소개글은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계신리마애여래입상

높이 2.23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8호. 부처울이라고 불리는 마을의 암자인 석불암(石佛庵) 부근에 위치해 있다. 남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강변의 높이 4.5m, 넓이 2m 암벽에 양각(陽刻: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일)되어 있다.

원형의 두광(頭光: 부처나 보상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대좌(臺座)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상태도 아주 양호하다. 얼굴은 넓적한 방형(方形: 네모반듯한 모양)이며 뺨에는 살이 많다. 눈·코·입은 정제되어 있어 원만한 얼굴 모습을 이루며, 귀는 길어 어깨에 이른다. 약간 짧은 듯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분명하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큼직하다. 넓은 어깨 위에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불의(佛衣)가 걸쳐져 있으며, 양쪽 팔을 감고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그 사이의 U자형 주름과 내의 띠 매듭, 왼쪽 어깨 부분의 불의를 고정시키는 고리 등의 표현이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을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왼손은 옆으로 내려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光背: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는 3중의 두광만을 마련하고 있는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선각(線刻: 선으로 새김.)으로 새겨진 연화좌(蓮華座) 위에는 양쪽으로 넓게 벌린 발이 낮은 부조(浮彫: 돋을새김)로 표현되어 있다.

양감 있는 얼굴, 당당하지만 다소 경직화된 신체, 불의 안의 띠 매듭, 왼쪽 어깨 위에 불의를 고정시키는 고리 장식 등의 표현은 같은 여주군에 있는 포초골미륵좌불(경기도유형문화재 제35호)과 비견된다.

이 작품은 건장한 신체, 유려한 옷주름, 세련된 연꽃대좌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당대의 수작(秀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얼굴과 하체 등 신체 각 부분에서 보여지는 다소 형식화되고 경직된 듯한 느낌은 포초골 석불좌상과 같은 시기인 고려시대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도곡리 석불좌상은 네비에 나오지 않았다. 주소로 검색해서 찾아갔는데 길 끝에서 조금 헤맸다. 그린팬션이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말고 오른쪽 길로 올라가야 한다. 끝까지 가면 차를 돌리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자신이 없다면 갈림길에서 걸어가는게 나을듯하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전체 크기 307㎝, 불상 크기 193㎝. 원적산(圓寂山) 자락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팔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고 현재는 보호각 안에 봉안되어 있다. 머리칼은 나발(螺髮: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며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는 마모되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왼손은 엄지손가락을 손바닥 쪽으로 살짝 당겨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 대고 있다.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는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으로 넓게 트인 대의(大衣: 설법을 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중의 옷) 안에 내의(內衣)를 입었다.

양팔에서 형성된 두터운 옷주름은 양 무릎으로 흘러내려 人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옷자락 일부는 그대로 흘러내려 양 무릎 위에 독특한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왼쪽 어깨 위에는 대의 자락을 고리로 고정시켜 삼각형 주름을 만들었다. 등 뒤에는 간략하게 대의(大衣)의 윤곽선만을 나타냈다.

상·중·하대로 구성된 대좌는 불상에 비하여 작은 편이다. 상대석의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은 8엽(葉)이고 그 사이에는 간엽(間葉: 사이 잎)이 있다. 연꽃 안에는 두광(頭光: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을 갖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와 같이 상대석 연꽃 안에 불상을 표현한 경우는 다른 불상 대좌에서는 그 예를 찾기 어렵다.

중대석은 8각형으로 여섯 면에는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서 있는 신장상을 새겼다. 나머지 두 면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하대석에는 16개의 연꽃을 표현하였고 그 아래 8각형의 각 면에는 안상을 새겼다. 지대석은 현재 땅에 묻혀 있는데 세 조각으로 깨어졌다.

이 불상은 얼굴 모습이나 왼쪽 어깨의 삼각형 주름, 양팔의 계단식 옷주름, 상·중·하단을 갖춘 팔각 대좌 등으로 보아 9세기 조각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근처 여주 포초골 미륵좌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35호), 여주 계신리 마애여래입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98호)과 더불어 이 지역 조각 양식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10세기 경에 제작된 봉림사지 석조여래좌상과 비슷한 수법을 보이고 있어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36493

 

 

 

 

 

포초골 미륵좌불은 여주 대성사로 검색해서 찾아가면 된다.

전체 높이(대좌 포함) 2.4m. 불상 높이 1.7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호. 포초골에 전해지는 석불좌상을 1941년 지금의 대성사에 봉안하여 오고 있다.

이 불좌상은 부근에서 발견된 비석 파편에 ‘嘉慶二十四年 化主幼學田錫元…(가경24년 화주유학전석원…)’이라고 새겨져 있어 지금까지는 순조19년(181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불상의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보면 그보다 훨씬 이른 고려 전기의 것으로 생각된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천개(天蓋)를 쓰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양감(量感) 있는 둥근 얼굴에는 내려 뜬 눈, 작은 입이 비교적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카락은 소발(素髮)이다. 신체 역시 얼굴과 마찬가지로 양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다소 투박한 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각 부분의 조각이 비교적 정제되어 있다.

양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 위에 놓고 있다. 왼손은 오른발 위에 놓여져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다.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불의(佛衣) 안에는 띠 매듭이 선명하며 어깨에서 팔로 돌아 흐르는 불의 주름이 유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나뉘어진 8각연화좌이다. 원형의 상대(上臺)는 연꽃무늬가 이중으로 돌려져 있고 각 연꽃잎 안에는 꽃무늬가 있다. 8각의 중대(中臺)는 각 면마다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안에는 보살상이 양각되어 있다.

하대(下臺)는 현재 마루 밑으로 들어가 있어 세부 파악이 어렵다. 하지만 역시 원형이며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의 연꽃무늬가 있다. 이 같은 특징의 대좌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특히 유행하던 것이다.

이처럼 대좌에서뿐만 아니라 불상에 있어서도 안정감 있는 모습, 신체 각 부분과 불의 주름의 비교적 사실적이고 정제된 조각 수법 등에서 통일신라의 양식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머리 위에 얹혀진 사각형의 천개(天蓋), 당당하지만 투박함을 면치 못하는 하체의 표현, 대좌의 연꽃무늬 등은 이 불좌상을 고려 초기의 거불(巨佛) 형식을 잇고 있는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게 한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0199

 

 

 

다시 시내로 들어와서 영월공원으로 향한다. 주차장에 바로 위에 두기의 탑이 나란히 있다. 각각의 곳에 있던 것을 여기로 옮겼다. 

 

 

보물 제92호. 높이 3.7m. 본래 하리의 옛 절터에 서 있었던 것을 1957년 11월에 한강변에 있는 영월루(迎月樓) 밑의 공원 산중턱으로 옮겨 세워 바로 옆의 여주 창리 삼층석탑(驪州倉里三層石塔, 보물 제91호)과 나란히 있다.

석탑의 구성은 신라 이래의 전형적인 일반형 양식을 계승하여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쌓은 방형탑이다. 하층 기단의 구조는 일반적인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갑석(甲石)은 상면에 현저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 중심에 상층 기단 면석을 받기 위한 높직한 2단의 몰딩(moulding: 테두리장식)이 있다.

상층 기단 면석은 4매판석으로 구성하였는데, 2면에는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측면에까지 모각(模刻)하였고, 다른 2면에는 평판석을 그 사이에 삽입하는 구성형식을 취하였다. 갑석은 평박한 편이고 밑에는 얕은 부연(副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그리고 상면 중앙에는 역시 높은 2단의 몰딩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이다. 각 층 옥신에는 우주형이 얕게 모각되었으며 초층 옥신은 특히 높은 편이다. 옥개석 각 층 받침은 4단이고 추녀 밑은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 이르러 상향(上向)하였다.

낙수면의 경사는 온화하며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은 약하다. 옥개석 정상에는 굄 1단이 있어 위층의 옥신을 받치고 있다. 상륜부는 전부 결실되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이 탑을 옮겨 세울 당시 특이한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되었는데, 일반형 석탑의 사리공과는 정반대로 초층 옥신 상면 중앙에 18.8㎝×21.2㎝의 얕은 층단 위에 10.6㎝×13.6㎝, 높이 3㎝의 돌기가 있어 마치 대(臺)와 같은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지름 3㎝와 1.5㎝의 2개의 둥근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내용물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 이 둥근 구멍이 무슨 용도였는지 알 수 없다.

또, 이 위에 얹히는 옥개석 밑면에는 1변 25.8㎝, 높이 12㎝의 단면능형(斷面菱形)의 홈이 팬 부분이 있어 사리공 돌기부 상면에서 9㎝에 가까운 공간을 남기면서 덮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리공의 구조는 특이한 예로서 매우 주목되고 있다.

이 탑은 외형의 온아한 비율이나 각 부 구조의 규율성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이 속했던 사찰은 여주시내의 평지에 창건되었던 사찰이나, 그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보물 제91호. 높이 2.46m. 본래 구 여주읍 과수원 내의 옛 절터에 있었던 것을 1958년 11월에 한강변에 있는 영월루(迎月樓) 밑의 공원 산중턱으로 옮겨 바로 옆의 여주 하리 삼층석탑(驪州下里三層石塔, 보물 제92호)과 나란히 세웠다.

이 석탑은 2중기단 위에 3층 탑신을 건립하여 일반형 석탑에 속하나, 일반적인 양식과는 다소 다른 기단부가 주목된다. 즉, 기단 밑에 이중으로 여러 장의 석재(石材)를 사용하여 대석(臺石)을 삼고 그 위에 1석으로 된 하층 기단(下層基壇) 면석을 얹었다.

면석 각 면에는 우주(隅柱)나 탱주(撑柱)의 표현이 없고 다만 1면 2구식의 안상(眼象)이 있는데, 지선(地線)에서 꽃모양의 무늬가 솟아 고려시대 안상의 특징을 보인다.

또 갑석은 1석으로 상면에 16판(瓣)의 연화(蓮華)가 조각되었으나, 면석의 안상과 함께 마멸이 심하다. 윗면 중앙에는 낮은 굄 1단이 있어 아무 조각이 없는 1매석의 상층 기단 면석을 받았다. 상층 기단 갑석은 매우 두껍고 밑에는 안쪽으로 구부러진 곡선으로 부연(副椽)에 대신하고 윗면에는 2단의 탑신굄이 새겨져 있다.

초층 탑신은 단일석으로 4면에 우주형(隅柱形)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고, 2층 이상은 급격히 체감되면서 옥개 윗면에 붙여 1석으로 만들었다. 모두 각 면에 우주형이 있고 3층 옥개석 위에 4층 탑신으로 보이는 석재가 옥개와 한 돌인 채 남아 있을 뿐이다.

옥개석은 3층이 남아 있는데, 받침은 각 층 3단이고 추녀는 매우 두껍고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의 상향(上向)이 있다. 낙수면(落水面)의 경사는 극히 완만하며 전각의 반전(反轉)도 희미하다.

하층 기단 갑석의 복련(覆蓮)이나 상층 기단 갑석의 부연양식은 매우 드물게 보는 특이한 양식이다. 그러나 각 부 부재가 모두 투박하여 전체의 형태가 고준(高峻)해보인다. 질이 좋지 않은 석재를 사용한 이유도 있지만, 조각의 수법도 우수하지 못하며 옥신과 옥개석을 1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등 약화의 경향이 역력하다.

또, 현재 최상층의 옥신과 옥개석의 비례는 2층 옥개석과 3층 옥신의 크기와 맞지 않아 그 사이에 1층이 빠지지 않았나 의심된다. 따라서, 원래는 5층탑이 아니었던가도 추정된다.

이 탑의 초층 탑신석 윗면에서 크기 16.7㎝×10㎝, 깊이 3㎝의 얕은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되었으나 사리장치는 완전히 없어졌고, 하대석 밑에서 높이 4.4㎝의 동제여래좌상(銅製如來坐像)이 옮겨 세울 당시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탑의 조성 연대는 각 부의 조각과 조탑양식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응형

'문화재 답사 > 불교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남_논산시-01  (0) 2018.07.27
경기도 여주시_고달사터  (0) 2018.07.23
경기도 여주시_01-신륵사  (0) 2018.06.25
충남 서산시  (0) 2018.05.25
충남_보령 성주사터  (0) 2018.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