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거주하던 동남쪽에서 서산은 접근하기 힘든 곳 중에 하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익히 알고 있듯이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호)-정확한 명칭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이 있어 여러번 방문하였다.
처음이 대학 답사 때였는데 건물에 갖혀 있어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주로 단체 답사로 오게 되는지라 보통 오후나 되어야 도착하게 되어 제대로 그 미소를 볼 수가 없었는데, 몇 년 전 퇴직을 준비하면서 정착지를 찾아다니다 들렸을 때는 마침 시간이 오전이라 부처님의 미소를 온전히 볼 수 있었다.(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아 갈 때에는 오전에 가시라. 꼬~~옥)
그 이유는 이 불상이 동쪽을 향해 있기 때문에 햇빛에 따라 입모양이 변해서 오후가 되면 미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햇빛 때문에 붉은색으로 보인다. 보정을 해 원색으로 돌리면 이렇게 된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여 형성되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문화재청에서 퍼옴>
미소가 환상적이지 않나?
우리나라에는 백제를 대표하는 미소만 있는게 아니다. 신라의 미소라 하면 우리는 이것을 떠 올린다.
흔히 경주 흥륜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수막새이다. 지붕위에 올리는 기와는 수키와와 암키와로 구분하는데 막새는 끝을 마감하는 기와이다
그런데 신라에서도 서산 마애삼존불에 버금가는 미소를 가진 불상이 있다. 아니 있었다.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이 그것이다. 지금도 보호각안에 보호(?)되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 아마 그늘이 들어 이끼 등이 앉아 - 지금은 얼굴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20여년 전 보호각이 없었을 때의 모습이다. 얼굴이 마모된 이후 누군가가 기둥에 예전의 사진을 붙여 놓았는데 그 또한 사라지고 없다. 지금 삼릉 주차장에서 엽서를 나눠 주는데 그 중 하나에서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수막새보다는 이 불상을 신라의 미소라 해야 되지 않을까? 지금은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말이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보호각을 세우는 것을 제고해야 한다.
서산마애삼존불에서 계곡 위로 1.5km정도 올라가면 보원사터가 나온다.(차로 이동이 가능하다.) 대개 절터는 쓸쓸함이 앞서지만 건물이 없는 것에서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드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그 중의 하나였다. 고려 광종 때 법인국사를 보내어 국가가 관리한 절이라 하고,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백제의 불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있는 유물로 보아서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의 사원으로 짐작되고 있다.
오층석탑(보물 104호)은 여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2층기단위에 5층의 몸돌과 옥개석을 올렸는데 체감률이 균형감이 있어 웅장하게 보인다. 찰주가 남아있고 특히 기단에 사자상과 8부중상이 새겨져 있다. 탑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법인국사탑과 탑비(보물 105, 106호)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탑이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홈피에서 가져옴>
이 외에도 당간지주(보물 103호), 석조(보물 102호)가 있다. 절터의 뒷산이 상왕산(象王山)이라 한다. 코끼리 등처럼 듬직하고 걷기에 편한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법인국사탑이 있는 곳에서 개심사로 넘어가는 아라멧길 표지판이 보인다. 걷기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걸어도 좋겠다. 게으른 사람은 차로 이동해도 된다.
개심사의 봄은 화려하고 혼잡스럽다, 벚꽃이 유명하여 상춘객이 차고 넘친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제법 경사가 가파르나 걸어갈 만하다. 벚꽃이 만발할 때에는 카메라 셔터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꽃 사진은 Photography 편 참조) 그 중에서도 명부전 앞에 있는 청벚꽃은 보기 귀한 것이라 특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이나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다는 자연스럽게 생긴 그대로의 나무로 지어진 범종각이나 심검당에 눈이 더 오래 머문다.그냥 돌아가기가 아까워 몇군데 더 들렀다.해미읍성
아래는 차례로 동문동 당간지주와 5층석탑, 여미리 석불입상이다.
인근 유기방 가옥은 뒷산에 수선화가 한창이었다. 시기를 잘 맞추어 가보자. 입장료도 받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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