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불교 문화재

충남_보령 성주사터

그저 물처럼 2018. 5. 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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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대학원 면접 때 나에게 물은 질문?

답사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성주사터입니다.

이유는? 뭐라고 답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초봄 또다시 찾은 이곳은 변해 있었다.

 

TV에 출연하기 위해 화장을 한 사람을 보는 느낌이랄까?

새롭게 단장한 절터의 유물들은 그대로 였으나 저녁노을 때 황럄함에서 오는 그 무엇은 찾기 힘들었다.

 

(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 불우 佛宇를 돌며 울다가 며칠만에 죽었다. - 삼국사기-

(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붉은 말이 있어 밤낮 여섯시에 사원을 돌았다. - 삼국유사-

 

신라말 9산선문의 하나로 처음에서 오합사라 했다가 낭혜화상이 중건하면서 성주사 聖住寺라 했다.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고 있어 평안한 느낌을 준다.

절터로 들어서면 중문이 있고 5층석탑 뒤에 금당(중심건물)이 있고 그 뒤로 강당터가 남아있다. 금당터에는 돌로만든 연꽃대좌가 깨진채로 있는데 크기로 봐서 큰 불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5층석탑

절터 한가운데에 자라잡고 있다. 상륜부는 소실되었고,  2층기단 위에 5층의 몸돌이 비교적 고른 체감률을 보여 상승감이 뚜렷하다.

 

 

3층석탑: 5층석탑 뒤에 세개의 석탑이 보좌하듯 늘어서 있다. 똑 같은 형태가 아니라 중앙에 있는 탑이 가장 화려하다. 이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숭안산 성주사 사적>에 의하면 정광, 양사, 가섭의 사라탑이라고 적혀 있어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낭혜화상 부도비

서북쪽에 전각이 있고 그 안에 국보 8호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있다. 무열왕의 후손으로 당에서 유학할 당시 여만선사로부터 "중국이 선풍을 잃어버리게 되면 신라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라며 칭찬을 하였다 한다.

845년 귀국하여 오합사 주지가 되면서 버성하였고 그가 죽자 시호를 낭혜라하고 탑이름을 백월보광이라 하였다. 최치원이 짓고 그의 사촌동생인 최인곤이 글을 썼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에서 글과 사진을 가져옴

 

 

 

석불입상

하반신이 묻혀 있었던 것을 재단장 하면서 대좌(그냥 돌이지만)까지 만들어 모셨다. 시멘트를 걷어낸 얼굴은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가 앖다. 그래도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손모양과 법의도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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