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박물관에서 하는 마지막 답사지는 논산이었다. 6월 19일(일). 마침 밤꽃이 피는 시기였는지 밤나무가 온통 산을 뒤덮고 있었다.
휴게소 이름도 '정안알밤'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주에는 밤막걸리가 있었다.
이 날 답사지는
돈암서원- 김장생묘- 관촉사- 중식- 궐리사 및 명재고택- 중학당- 노강서원이다.
▶ 돈암서원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양반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폐하였다. 덕분에 서원에 딸린 노비와 농토가 국가에 귀속되면서 나라 살림도 좋아졌고, 양반의 등살에 힘들었던 농민들도 삶이 좀 나아졌다고 교과서에 실려있다.
이때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에 하나가 돈암서원이다.
보물 156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응도당(凝道堂)은 영(榮)이라고 하는 눈썹지붕이 눈길을 끈다. 마지막에 있는 노강서원에서도 보인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담장에는 한자가 있다. 아마 서원을 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이 살자는 뜻이었겠지만 후학들은 과연 그러했을까? 서원철폐를 한 흥선대원군은 반대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면 공자가 살아 돌아온다해도 용서하지 않겠다."
지부해함(地負海涵):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주듯 모든것을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 김장생 묘
이이의 주기론을 계승하면서 예학을 발전시켰다. 이는 그가 바라지는 않았는지 모르지만 후대에서 예송논쟁을 야기시켰다. 그와 일가들의 묘역은 잘 관리되고 있었고 곳곳에 신도비들의 그들의 권력을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들의 사상이나 무덤(풍수사상)보다는 무덤을 지키고 있는 석물과 종가 앞에 핀 연에게 눈이 더 가더라.
▶ 관촉사
흔히 우리에게 은진미륵이라고 알려진 불상이 있는 곳이다. 실로 오랜만에 들렀다.
절은 건물들이 많아지면서 번잡스러워 보인다.
교과서에는 고려 불상의 특징으로 거대함, 균형미 없음, 철불많음을 이야기 한다.
이제는 국보가 된 석조미륵보살은 목을 기준으로 하면 이등신이다. 거대하고도 균형미가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러나 어떤이는 바로 밑까지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위로 올려보면 균형감이 있어 보인단다.
이 상을 보살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오른손의 팔찌를 예로 들고 있다.
어떤이는 손에 들고 있는 연꽃 때문에 미륵보살이 아니고 관음보살이라고도 한다.
특별히 손모습이 강조되어 있어 얼굴은 상대적으로 조각미가 떨어져 부처나 보살상처럼 근엄하지 않고 후덕한 여염집 아낙의 얼굴이다.
배례석은 2개의 연줄기와 3송이의 연꽃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여기가 배례석의 위치가 맞다면 발밑에서 억지로 위롤 올려보며 균형미를 찾는 것은 지나친 의미부여가 이닐까 싶다.
석등은 오히려 둔탁하면서도 장중한 것이 불상과 어울린다.
문화재청에는
관촉사 앞뜰의 큰 석불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받침은 각이없는 굵고 둥그런 기둥으로 세웠는데, 위아래 양끝에는 두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8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곱게 장식하였다. 2층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기둥이 빈약한 반면 창은 터무니없이 널찍하다. 각 층의 지붕들은 처마가 가볍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한 꽃 조각이 서 있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다.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두었는데, 조각이 두터워서 인지 무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뒤에 서 있는 석불 못지않게 힘차 보이나, 화사석의 네 기둥이 가늘어 균형이 깨지고, 받침의 가운데기둥이 너무 굵고 각이 없어 그 효과가 줄어든 감이 있다. 뒤의 석불 즉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지금은 사천왕문을 통해 들어가지만 예전에는 해탈문을 통해서 들어왔었다. 높이가 낮아 머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다. 그래야 거대한 불상을 우러러 볼 때 더 경외심을 가지게 될테니 라는 뜻일까?
또다른 이야기도 있다.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절에와서 술믈 마시고 놀았단다. 스님들이 감히 양반들에게 반항을 하지 못하고 문을 작게 만들었단다. 들어 올때 고개라도 숙이라고. 소심한 복수랄까?
말 나온 김에 전설을 이야기 해보자.
한 여인이 반야산(般若山)으로 고사리 꺾으러 갔다가 아이 우는 소리 듣는다. 산중에 아이우는 소리가 괴이하여 찾아갔더니, 아이는 없고 거대한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올랐다한다. 조정에서 이 소문 듣고 불상 세우라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한다. 광종(光宗, 925 ~ 975, 고려 4대 왕)이 혜명(慧明, 생몰 미상, 고려 전기 승려)에게 불상을 조성케 하여, 100여명 석공을 동원, 38년 만인 목종(穆宗, 980 ~ 1009, 고려 7대 왕) 9년(1006)에 완공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불상 만들 때 몸통과 머리, 하반신 따로 만들어 어떻게 쌓아 세울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고 걱정하던 어느 날, 사제촌(沙梯村)을 지나다, 동자 두 명이 삼등분된 진흙 불상 만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먼저 평평하게 땅 고르고 아랫부분 세운 뒤, 경사지게 모래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 굴려 올려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혜명은 감탄하며 서둘러 절로 돌아와 아이들이 했던 방식으로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다 한다. 가르침 준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화현이라 한다.
불상 완성하자 비가 내려 묻은 흙 깨끗이 씻어주었고, 삼칠일 동안 서기가 서렸으며, 불상 이마에서 환한 빛이 나와 먼 곳까지 비추었다. 중국 고승 지안(智眼)이 그 빛을 따라와 예배하였는데, 광명의 빛이 촛불과 같다 하여 사찰 이름을 '관촉사'라 불렀다 한다.
불상에 얽힌 많은 영험담도 있다. 오랑캐가 침략하여 병사가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은진미륵이 노립승(蘆笠僧:삿갓을 쓴 승려)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분개한 적장이 승려 향해 칼을 휘둘러 삿갓을 스쳤다.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는데,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 몸이 빛나고 허공에 서기가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 전설이 전한다. 이 불상에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고도 한다.
논산지역에 염라대왕 대면 구전설화도 있는데요. 논산 사람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묻는답니다. 개태사 가마솥(충남 민속자료 제1호), 강경 미내다리(江景渼奈橋, 충남 유형문화재 제11호), 관촉사 은진미륵을 보았느냐고요. 모두 지역 명물이란 뜻이겠지요. 논산 8경으로 관촉사, 탑정호, 대둔산, 계백장군 유적지, 쌍계사, 개태사, 옥녀봉, 노성산성을 듭니다. 그중, 논산 제1경이 은진미륵입니다.
< 중도일보. 2018.02.23. 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관촉사부터 간간이 내리던 비가 점심을 먹고 나오니 굵어졌다. 따라서 사진도 없다. 명재고택은 주인장께서 박물관에서 왔다고 직접 나오셔서 설명을 해주시고, 관람이 안되는 내실도 안내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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