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결심하면서 아내가 수도권이나 그 가까이에서 살아보기를 원했다.
금방 떠오르 곳이 진천군이었다.
이유는 "生居진천"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으리라.
나중에 괴산, 청주, 천안과 함께 고민하다가 천안에 자리를 잡았다.
정말로 진천은 살기 좋은 곳일까?
생거진천이라는 말의 유래부터 알아보자.
용인에 살던 사람이 죽었다. 저승에 가니 잘못 왔단다. 다시 가라해서 와보니 자신의 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서 이곳저곳을 떠돌다 진천에서 죽은 어떤이의 몸으로 들어가 환생했다. 이 친구가 용인에서 자신이 살던 이야기가 생생하여 사람을 보내보니 말 그대로였다. 용인의 식구들도 데려와 함께 살다가 죽었다. 용인과 진천의 자식들이 서로 제사를 지내겠다고 우기다가 진천군수에게 소를 제기하였다. 진천군수 왈 살았을 때는 진천에서 살았으니(생거진천) 사거용인하라 라고 판결하였다. 이에 나온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 "이란다.
단순히 단어때문에 거주지로 정할까라고 생각을 한 곳이었다. 내 고향과 같은 이름의 백곡저수지가 있고 농다리가 있다는 것말고는 별다른 지식이 없는 곳을, 더위가 한풀 꺽인 8월 19일 차로 한바퀴 돌았다.
더위 때문에 많이 걷는 곳을 제외했다.
답사코스: 보탑사- 진천지암리석조여래입상- 진천교성리 연화대좌- 진천용화사석조여래입상- 진천산수리마애여래좌상- 진천태화사년명마애불입상
보탑사
황룡사9층목탑은 몽고와의 전쟁 때 불에타 초석만 남았다. 우리나라에는 목탑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법주사팔상전과 화순 쌍봉사에 목탑이 있었다.(쌍봉사 대웅전은 84년에 불탔다가 86년에 복원하였다.) 이제는 법주사 팔상전만 남았다.
보탑사 목탑은 위의 목탑을 본받아 만든 것이다. 역사적 유물이 아니더라도 귀한 목탑의 계보를 이어가기 바란다. 내부로 3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
보탑사에는 보물이 하나있다.(404호) 진천연곡리석비가 그것이다. 비문이 없어 다른 말로 백비라고도 불린다. 거북머리는 위부분이 깨져 말머리처럼 보인다. 귀갑이 뚜렸하고 이수에는 9마리의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진천지암리석조여래입상
보탑사에서 멀지 않는 문수암(진천군 금사로 252-106)에 있다. 육계가 뚜렷하고 백호는 없으나 삼도가 있다. 손이 상대적으로 크게 표현되었고, 옷주름은 도식적이다. 예전 사진에 비해 대좌의 연꽃도 많이 훼손되었다. 보존 대책이 필요할듯.
진천교성리 연화대좌
진천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있다. 규모도 크다. 상부의 대좌에 연화문과 보상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진천용화사석조여래입상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 584-4
7.5m의 대형 석불이다. 머리에 올린 보개는 원형에서 최근에 팔각형으로 바뀌었다. 인상은 화평하고 인자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목걸이를 하고 있다. 양 손으로 연꽃가지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처상이라기보다는 미륵보살상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왼쪽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보살입상이 있다.
진천산수리마애여래좌상은 성림사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다. 법당안에는 불상이 없이 바깥의 불상을 안에서 보게되어 있다.
하반신은 보이지 않으나 좌불이 확실하다 하고, 광배에는 3구의 화불이 있다. 법당 안에서 봐야 하는데 가까이 가기에는 불경스럽다할 것이고 법당 뒤로 돌아가면 법당 때문에 쉬이 보기가 어렵다.
진천태화사년명마애불입상은 위의 것에서 초평저수지로 가는 길목에 있다. 불상의 마모가 심해 잘 보이지 않으니 지나가는 길이 아니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어보인다. 오른쪽에 미륵이라는 명문이 있다.
초평저수지 부근에는 붕어찜 요리집이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