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불교 문화재

충북_충주시

그저 물처럼 2018. 9. 1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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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수), 오랜만에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뭉게 구름은 날 바깥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천안에서 충주까지 달렸다.

퇴직을 하니 친구가 그랬다. "백수는 휴일에 바깥 나들이를 말아라. 직장인들 좀 다니게"

당연히 휴일은 아니었고, 대부분은 유명한 유적지가 아니라 한적하였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둘러보자, 특히 충주 철불 3총사를.

그리고 중앙탑에서는 탑도 좋지만 남한강을 바라보며 여유를 부려보자.

 

원평리 석조여래 입상과 삼층석탑

나의 네비는 원평리삼층석탑으로는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주었다. 다시 주소로 입력해서 찾았다.

충북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 108-1

주차 공간은 충분하다.

불상은 等身을 제외한다면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위엄있는 모습으로 복련(覆蓮/꽃잎이 아래로 향한)의 대좌에 당당하게 서 있다. 이 곳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병자호란 때 폐사된 선조사지라 전한다. 왼손은 여원인(문화재 사전 참조)인데 반하여 오른손은 시무외인이 아니라서 불상의 명칭을 정확히 알수는 없다.  마을 이름이 미륵댕이라고 한 것을 보면 지방민들은 미륵불로 모시면서 안녕을 꾀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던 이 곳의 민중에게는 그들을 구원해 주는 미륵이 더욱 더 다가왔을 것이다.

8각의 보개(寶蓋), 머리는 나발이고 백호는 없다. 사각형의 얼굴에 우뚝한 코, 윤곽이 뚜렷한 입술, 이중턱이 중후한 인상을 준다. 양어깨에 걸쳐진 옷자락(통견)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흐른다. 

 

 

불상의 옆에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3층석탑이 있다. 자연석의 기단위의 면석이 다리가 3족인 향로를 양각하였다. 1층 탑신에는 마모가 심해 확인할 수 없는 조각상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자상이라하는데 만일 사실이라면 예외작인 것이라 볼 수 없는게 안타깝다.-  3층의 옥개석은 없으나 낙수면(지붕 경사면)의 경사가 제법 경쾌하다.

 

 

충주 추평리 삼층석탑

 

길에서 잘 보이는 곳이라 찾는데 어려움은 없으나 주차하기가 애매하다. 오가는 차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이곳의 지명이 엄정면이고, 조선왕조실록에 엄정사라는 기록이 있어 관련이 있어 그 절터라 주장해도 무방할 것이다. 탑은 특별한 특색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신라 하대의형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보면 될 것이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좁아 둔중해 보인다. 지붕돌의 끝에는 풍탁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보물 1527호

충주 답사에서 만나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철불을 보는 것이다. 그것도 3개씩이나. 이 곳은 번잡하지 않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절집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법당 안에 있다. 이 암자에 있게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인근에 억정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하여 그기서 옮겨오지 않았을까라고 추측들한다. 철불이라 느낌이 다르지만 석굴암 본존불과 형태가 유사하다. 1m 남짓의 높이에 나발과 육계가 뚜렷하다. 갸름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초리, 오똑한 콧날과 두터운 입술이 실제 인물을 표현한 듯하다. 당당한 어깨에 우견편단(우측 어깨를 드러낸 옷차림)에 흘러내리는 옷주름도 사실적이다.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과 가장 유사한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시간이 되면 법당에 주저앉아 실컷보라.

진짜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다음에 소개될 철불은 두려움이 생기는데 이 부처는 평안하다.

 

 

충주 억정사지 보각국사탑/ 보물 16호

나에거 비석을 보는 것은 계륵이다. 다른 문화재가 있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특별하면 모르나  그냥 지나칠까, 말까로 갈등한다. 이 곳이 딱 그러한 곳이었다. 인근에 백운암 철불좌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찾아가서 볼거는 아니란게 내 생각이다.

대지국사의 이름은 찬영, 속성은 한씨이고 양주 사람이다. 비문은 대지국사가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태어나 14세에 출가하고 공양왕 2년(1390)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하고 대사의 인품과 학력을 기리는 내용이다

비문은 대지국사가 에 태어나 14세에 출가하고  입적할 때까지의 .

사과밭 속에 자리하고 있다. 가까이 차가 들어가기는 하나 돌아 나올 때는 조금의 주의가 필요하다. 가을에 가시게 된다면 서리는 생각을 마시라. 독수리(?)가 떡 버티고 노려보고 있더라.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보물 1401호

여기도 유적명으로 말고 지번으로 찾아가야 했다.(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산 27) 내동대교-大橋는 아니고 개울이다.-를 건너자마자 둑길로 우회전 해야 한다. 우일농장으로 들어가면 안된다.

 

둑길로 조금 들어가면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건너편 경사로(철제 계단)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그대로 옮긴다.

산비탈 두 곳의 커다란 암벽에 시기를 약간 달리하여 부조(浮彫)로 조각되어 있는 9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이다.
상부에는 높이 3.5m, 폭 8m의 바위면에 불좌상 1구가 양각되어 있고, 하부에는 불좌상 1구와 공양상(供養像)·반가상(半跏像)을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 등 모두 8구가 새겨져 있다.
비바람에 의한 마멸로 부분에 걸쳐 윤곽이 뚜렷하지 않지만, 마애불상(磨崖佛像) 중 비교적 초기의 예로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지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신라시대 불상조각의 흐름은 물론 고구려 불상의 경향까지도 함께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자료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

 

 

중원고구려비는 전시관이라는 거창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최근 각 지자체마다 유행처럼 유물 전시관을 만드는 데 내 눈에는 예산 낭비의 표본으로 보인다.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도 여기에 못지 않다.

기억이 가물하지만 단국대조사팀이 발견할 당시 아낙네들의 빨래판으로 사용되고 있었단다. 하기사 비석 글자 음각이 비눗물을 잘 붙잡이 주었을 것이다.

 

중앙탑/ 충주 탑평리 7층석탑/ 국보 6호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박물관도 들어섰고 주변이 깔끔해졌다. 남한강의 절경은 덤이다.

석탑 앞에는 석등의 하대석으로 보이는 8각의 연꽃무늬 돌이 있다. 신라 탑이 대부분 3층인데 반하여 7층은 귀하다.

공부보다는 강변에 서서 그저 바라만 보는게 더 좋더라.

문화재청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 & 석조약사여래입상불상은 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있고, 탑은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몸돌에는 우주를 새겼다. 층급 받침이나 낙수면으로 볼 때 고려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상
오층석탑에서 나와 좌회전하여 100여미터 가면 마애불 휴게소가 있다. 그 옆 철문으로 올라가서 산막이 있는 곳에서 왼쪽 강가로 내려가면 만나게 된다. 약한 돋을 새김이고 마모도 심하다. 임진왜란 때 여기에서 죽은 신립의 피라고 하는 철 성분의 붉은 빛이 군데군데 보이고 양 손이 표현되지 않았다. 강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강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불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충주 철조여래좌상/ 보물 98호

충주 시내 대원사에 있다.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 찾아 간 절(대원사)에는 친절하게 법당에 불까지 밝혀 주신다. 감사한 마음과 철불에 대한 기대를 한껏 가지고는 안으로 들어선다.(극락전이다.) 

불상은 아마 탑의 몸들이나 기단부 돌을 대좌로 삼고 앉아 있다. 철불답게 나발(소라모양의 머리칼)과 육계가 뚜렷하고, 얼굴은 근엄하지만 찢어진 눈 때문에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얼굴에 비해 상체는 살짝 작고, 양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옷주름은 도식적이지만 군의 매듭이 선명하다.

여기저기 안식처를 찾아다니던 중에 양손이 소실되어 지금은 나무로 다시 만들었단다.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보물 512호

대원사에서 멀지않은 단호사에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지나간 세월을 한껏 짊어진 소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아래 조그만 석탑이 있다. 철불은 대원사 철불과 같은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전해지는데 조명 탓인지 내 눈에는 달리 보인다. 특히 눈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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