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하면서 거주지로 가장 많이 생각한 곳 중에 하나가 청주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예전 여행에서 좋은 여운이 있었고, 인근에 오송역(KTX)과 공항이 있어 다니기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나름 최적지라 생각했었다. 천안에 자리를 잡은 후 몇번 공항을 이용할 기회기 있어 청주를 방문했었는데 우리에게는 아직이었다. 대구와 경주를 자주 다녀야 하는 우리에게는. 그래도 언젠가 꼭 살아보고 싶은 후보지리스트에 올려두고 있기는 하다.
10월 7일. 일요일이었다. 12시가 넘어서 출발했다. 청주 소재의 중요 문화재는 청주박물관에 있다. 시간이 늦어 다음에 오기로 하고 패스. 청주대학교 박물관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 청주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
▶청주시 청원구 정하동 산 9-1
소재지가 상당구에서 청원구로 바뀌었다. 무심천변/ 정하교 바로 옆이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남쪽을 향해 혼잎(줄기에 붙는 잎몸이 1장뿐인)의 연화대좌에 비로자나불이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돋을새김인 얼굴은 네모지고 평면적이며 백호의 흔적이 뚜렷하다. 머리에는 관을 쓴듯하고 원형의 두광이 있다. 그 외 얼굴은 마모로 인해 코는 주저앉았고, 입술도 앞으로 빼어물고 삐딱하게 보인다.
몸은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통견의 옷주름은 부처의 몸 실루엣을 잘 표현하고 있고, 무릎 부분의 돌이 앞으로 돌출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양감이 두드러진다.
수인은 지권인인다.
■ 청주 용화사 석조불상군(보물 985호)
시내 무심천변 제1운천교와 청주대교 사이에 있다. 모두 7구로 원래는 개울가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현재는 삼불전 三佛殿에 3구, 극락전에 4구를 봉안하고 있다. 절마당에 예전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문화재청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이 글도 지금과 같이 불상들이 분리되기 전의 기록으로 보인다.
용화사 법당 상량문(上樑文: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엄비(嚴妃)의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이들 중 왼쪽 3번째의 불상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 5번째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羅漢像)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머리 부분과 양 손을 나중에 보수한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한 것이 특징이다.
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삼불전 앞에는 부서진 탑재들이 있다.
■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41호)
상당로 청주영플라자 뒷편에 있다. 무작정 가다보면 주차 때문에 낭패보기 십상이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직접 보면 후회하지 않을 귀한 문화재이다.
높이 12.7m. 청주 중앙공원 동북쪽의 여러 건물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철로 만든 당간이다.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안성 칠장사 당간(경기도유형문화재 제39호)과 함께 현재 전하고 있는 대표적인 철당간이다. 특히 건립 시기가 명확히 알려져 있는 귀중한 철당간이기도 하다. 철당간의 주변 지역은 이전의 절터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넓은 광장으로 변하여 관련 유물을 확인할 수는 없다.
당간은 화강암으로 만든 지주 사이에 끼워져 있다.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며,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굵게 돋을새김된 선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앞뒤쪽면의 테두리에는 가늘게 오목새김된 선이 있는데, 바깥쪽면의 돋을새김된 선과 어울리면서 장식적인 의장(意匠)을 보인다. 꼭대기 부분에는 안쪽면에서 바깥쪽면으로 약간의 굴곡이 있고, 맨 아래부분에는 널찍한 받침돌과 간대(竿臺)가 놓여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장치는 꼭대기 부분의 안쪽면에 빗장 모양으로 마련되었다.
당간은 원통 모양의 철통(鐵筒) 20개를 위아래로 물려 이어지게 만들었다. 아래로부터 세 번째 철통에는 393여 자의 글자가 주조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그것에 의하면, 이 당간은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졌으며, 청주 지역의 호가(豪家)인 김예종(金芮宗)이 사촌형 희일(希一) 등과 함께 철당간을 주조하여 사찰을 꾸몄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는 유행병인 염질(染疾)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부처께 재앙의 예방과 사후의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고 하였다. 기문에서 ‘유준풍삼년태세임술삼월이십구일주성(維峻豊三年太歲壬戌三月二十九日鑄成)’이라고 하였는데, 준풍은 고려 광종 11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므로, 이 철당간이 962년(광종 13)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39446
■ 청주 탑동 오층석탑
▶청주시 상당구 탑동로 35
네비를 찍어 도착해서 기와집이 있는 담장을 만나게 되면 제대로 도착한 것이다. 현풍곽씨 효자비각 안에 탑이 위치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기가 애매한데 아래 빨간부분이 효자각이고, 파란네모칸으로 출입하면 된다.(나는 그랬다. 집주인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굵은 노끈 3겹이 있고 바로 옆에 쪽문(사진에는 없지만)이 달려 있다. 차는 도로변에 주차 가능하다.
이 탑으로 지역명이 정해졌다고 하며, 인근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기단부는 없어졌고, 탑신부도 사방불이 조각된 하나만 보인다. 5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남아있는 옥개석은 1, 2, 3, 5층이고 나머지는 근래에 만든 것이라 한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이고 몸돌에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최고로는 신라말기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의 위치대로 동면(약사여래), 남면(비로자나불), 서면(석가여래), 북면(아미타여래)의 사방불이 있다. 경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나, 서쪽에는 아미타여래를 배치하는 것이 공통적이다. 비로자나불은 모든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에 사방불에는 표현되지 않으나 여기에서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사방불은 비로자나불이 동서남북으로 현신하는 모습을 조각했다고도 한다.)
사방불은 경주 굴불사지사면석불, 칠불암사면석불과 예산화전리사면석불이 유명하다.
위 완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석가여래(항마촉지인), 비로자나불(지권인), 아미타여래(설법인), 약사여래(약가인-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다.)이다.
■ 청주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입)상
자그마한 돌판에 어린아이의 모슴을 한 불상 2구를 새겼다. 흔히 삼화령애기부처라고 부르는 삼화령 미륵삼존불상(경주국립박물관)의 협시와 닮았다. 아담한 입술은 귀엽고 앳된 미소를 짓고 있으며, 통견의 옷주름은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수인은 동일하나 좌우대칭이 바뀌어 있고 손가락의 움직임이 정교하다.
이병불상의 유래는
다보여래가 보살로 있을 때 어느곳이던지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나타나 그 설법이 진실임을 증명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한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그곳에 보탑을 출현시켜 설법이 진실임을 입증하고 찬양했으며 보탑 안 자리의 반을 비워 석가모니에게 양보했다 한다. 다보여래는 진리를 나타내는 부처이고 석가여래는 진리를 설하는 부처다. 한자리에 나란히 앉은 것은 진리 그 자체와 진리를 설하는 부처가 똑같이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다 하겠다.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두 탑의 본래 이름이 ‘석가여래 상주(常住) 설법탑’, ‘다보여래 상주(常住) 증명탑’인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으며, 건물과 앞 5층석탑도 시도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차에서 내려 들어가는 길 기와에는 순례객들의 기원이 작지만 정성이 가득하다.
■ 청주 계산리 오층석탑(보물 511호)
이번에도 네비는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 피반령을 넘을뻔했다. 쉽게 찾는 방법으로는 계산1리 경로당으로 찍고 아래 그림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청주에서 간다면 가덕면사무소를 조금지나 인차삼거리에서 미원방향 509번 지방도로 들어서야 한다. 지방도로의 시작점에는 말미장터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넓직한 대지 때문에 멀리서는 작아보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5.9m라 한다.-탑이다. 2층 기단 면석은 작아서 더욱 수직 상승감이 돋보인다.(이것은 백제 양식이다.) 탑신과 몸돌들은 그 크기에 맞게 2개 도는 3개 이상의 돌로 맞추어 놓아서 전체적으로 어수선해 보인다. 옥개석(지붕돌) 밑면 받침은 1~2층이 5단이고, 3~4층은 4단이며, 5층은 3단으로 점차 줄어들고,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다. 그럼에도 몸돌과 옥개석의 체감비율이 적당하여 균형감이 있다.
■ 청주 안심사
오후 6시가 다 되어 안심사에 도착했다. 해질녁의 안온한 빛을 받은 절은 고즈녁하고 평화로웠다.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괘불탱은 당연 아니겠지만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옆에 "영산회괘불탱"을 걸어 놓았다.
진품은 조선효종 2년(1652)에 만들어진 것으로 석가모니가 영취(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니다. 괘불(掛佛)이란-괘(걸다-경주 괘릉도 같은 의미이다.)-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거는 걸개그림을 말한다.
당간지주와 달리 법당 앞에 당간지주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이것이 괘불대이다. 양쪽으로 긴 장대를 세우고 그기에 걸개그림을 거는 것이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이 여기에서 생겼단다. 법당이 좁아 바깥에 괘불의 걸고 단상을 마련하였다. 당연히 사람이 많았겠고, 그러면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두개의 사진을 비교해 보시라.
부처대좌 바로 아래에 문수보살(연봉오리를 들고 있다.)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고, 중앙 좌우측에 합장을 하고 있는 이가 제석천과 범천이다. 가섭존자와 아난존가가 가까이에 있고 제자들이 그 위로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보물 297호)은 다포양식의 맞배지붕이다.
세존사리탑과 영산전도 시도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고 코스모스가 한들거린다. 남들처럼 찍어 볼려해도 잘 안된다. 그러다 잔뜩 힘만 주다보면 이렇게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