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경주 문화재

경주 남산_이야기

그저 물처럼 2023. 7. 21. 18:16
반응형

경주 남산은 역사와 전설의 보고(寶庫)이며 신앙의 중심지이며 야외 미술관이요 박물관입니다. 계곡마다 전설이 있고 불교의 흔적이 있고 바위마다 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삼국 시대부터 신라 말까지를 망라한 조각품들이 온 산에 가득하니 신라의 역사가 남산을 둘러싸고 있으며 신라의 문화가 여기에 집결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시조 왕의 탄생처인 나정(羅井), 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터(昌林寺址), 망국의 비애를 담은 포석정 터가 여기에 있으며, 오릉을 위시한 많은 왕릉과 고분이 있고 산성터가 있습니다. 

 

문화재 답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경주남산이 국민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등산 또는 문화재 답사를 목적으로 찾는 곳입니다. 

 

경주 남산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한 코스와 간략한 설명을 하기 전에 먼저 개괄적인 내용을 알아봅시다.

 

글의 순서
1. 경주남산의 설화
2. 경주남산의 봉우리

 

 

1. 경주남산의 설화

어느 날 서라벌을 흘러가는 시냇가에서 한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때 두 신이 새벌(경주의 옛 이름)로 찾아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 신은 둥근 얼굴에 샛별 같이 눈동자가 반짝이는 아주 부드러운 여신이었다.

 

신은 형화롭고 기름진 새벌의 경치를 둘러보면서 “야! 우리가 살 곳은 여기로구나!”하고 감탄하고 외쳤다. 이 때 빨래하던 처녀가 신들이 외치는 우레 같은 큰 소리에 놀라며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산과 같은 거대한 남자가 자기 쪽으로 발을 옮겨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린 처녀는 “산 봐라.” 하고 힘을 다해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산과 같은 사람 봐라!” 해야 할 말을 너무 급하여 “산 봐라!” 하고 외쳤던 것이다. 발 아래에서 들려 오는 비명 소리에 두 신은 발을 멈추었는데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처녀의 외침에 따라 그 자리에서 두 신은 산으로 변했다.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고, 남신은 검은 바위와 붉은 흙빛으로 울퉁불퉁한 산맥을 모아 장엄하게 자리한 남산이 된 것이라 전한다.

 

또한 경흥국사 이야기, 충담스님 이야기, 석가사, 불무사, 염불사의 전설 등은 당시 억압받던 민중들을 대신한 부처님이 지배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준엄하게 꾸짖어 주시고 돌아가신 곳으로 민중들의 마음의 안식처였으며 믿음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2. 경주남산의 봉우리

한 마디로 남산이라고 부르지만 다시 몇 개의 산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金鰲山) 도당산(都堂山,陶唐山), 양산(楊山) 그리고 외산의 주봉인 고위산(高位山) 등의 네개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금오산(金鰲山)

금오산은 남산의 주봉이며, 남산을 대표하는 별명처럼 되어 있습니다. 산의 높이는 468m로 494m의 고위산에 미치지 못하나 온 산이 유적으로 덮여 있어 모든 면에서 남산을 대표합니다.

‘금오산’이라는 이름과 산 전체를 예술품으로 메운 경이적인 존재는 신라 시대에 이미 당에까지 알려져 있었습니다. 최치원이 당에 유학했다가 돌아올 때 당의 유명한 시인인 고운(顧雲)이 송별시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들으매 바다 위에 세 금자라 있어

금자라 머리 위에 실은 산, 높고도 높네,

그 산 위

구슬과 자개의 궁궐, 그리고 황금의 전당

그 산아래

천리 만리에 펼쳐진 아득한 파도,

그 곁에 자리잡은 계림 푸른 곳

금오산의 정기 배어 영특한 이 낳도다.

 

고운(孤雲) 최치원을 금오산의 정기로 태어났다고 그를 칭송한 시이지만 금오산의 장관을 말해 주는 시이기도 합니다. 온 산이 대소의 절과 전각으로 가득 찼던 신라 당시의 남산은 모습이 안팎으로 얼마나 알려져 있었으면 외국의 시인이 “구슬과 자개의 궁궐, 그리고 황금의 전당”이라 했을까? 남산의 절경들도 모두 금오산에 있고 불적을 포함한 대부분의 남산의 사적들이 역시 금오산에 있습니다.

 

2. 도당산(都堂山)

이 산은 향교가 있는 교리(校里)와 문천(蚊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구릉이고 표고가 95m인 낮은 산입니다.  경부고속국도에서 경주에 진입해서 포항 또는 불국사로 직행하는 도로인 ‘서라벌대로’에 의해서 금오산과 갈라져서 완전히 독산(獨山)이 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산을 잇고 아래에 터널을 만들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이 산은 도당산(都堂山), 돗대산(檣頭山) 등의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유래와 뜻이 있습니다.

 

이 산의 원 이름은 ‘도당산(都堂山)’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당이라는 것은 중신들이 회합하여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신라 시대 도당이 바로 여기였던 까닭에 도당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돛대산’ 또는 장두산(檣頭山)이라는 이름은 경주의 지세를 풍수지리설에서 보아 생긴 이름입니다.

 

고려의 왕건 태조가 도선에게 신라를 빨리 멸망시키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도선(우리 나라 풍수 지리학의 원조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이 왕건의 물음에 답하기를 신라 서울의 지형이 주행형(舟行形)이니 배를 침몰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풍수가를 신라에 보내 거짓을 건의하도록 하는 계략을 꾸밉니다. 그 풍수가는 신라 왕에게 건의하기를 서울의 지형이 봉황형인데 그 봉황이 날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그러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고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봉황도 짐승이라 그 알에 애착을 느낄 것이니 흙으로 크게 봉황의 알을 만들어 두게 하고

 

둘째로는 봉황은 맑은 물을 좋아하니 곳곳이 샘을 파 두어야 하고

 

끝으로 그래도 달아날까 봐 두려우니 날개 죽지에 금을 넣어 두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흙으로 산을 만들고 배 바닥에 구멍을 뚫고 돛대를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되었으니 그 배가 침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3. 양산(楊山)

도당산을 서쪽으로 돌아 서남산 쪽으로 나가면 산록(山麓)에 구릉형의 산이 있는데 이것이 양산입니다.

 

양산의 기슭 일대는 시조가 탄생한 우물인 나정이 있고 다음으로 신라의 국신을 모시는 나을신궁(奈乙神宮)이 있었던 곳으로 신라 건국과 관련이 많은 곳입니다.

 

4. 고위산

금오산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이며 높이는 494m로 남산의 최고봉입니다. 산정에는 봉화대로 궁궐을 영위한 곳도 여기며 나정을 지나가 있고 서남으로 대지를 이루고 있는 곳에 천룡사지가 있습니다.

 

신라의 고찰인 천룡사가 여기에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일명 천룡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천룡사지에서 산정으로 이르는 곳에 용두암(龍頭岩)이 있고 산정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백운대 대마애불이 있습니다.

 

천룡사지에서 서북으로 넘어가면 남산 굴지의 기승지(奇勝地)인 반약계(般若溪)가 있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천룡 계곡이 되는데 그 중간에 와룡 폭포가 있다.

 

다음은 경주 남산에서 가장 인기있는 답사 코스입니다.

 

경주 서남산 답사 (tistory.com)

 

경주 서남산 답사

삼릉골에서 금오산으로 올랐다가 용장골로 내려가는 코스입니다. 경주 남산 답사 코스 중에 하나만 꼽자면 당연히 여기가 제일입니다. 문화재가 가장 많이 있고 등산도 겸하면서 걷기와 보는

gimigi.tistory.com

 

 

 

 
반응형

'문화재 답사 > 경주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굴불사터 사면 석불  (0) 2023.07.24
경주 배리 석불입상  (0) 2023.07.23
경주 서남산 답사  (0) 2023.07.22
시작하면서  (0) 2020.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