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골에서 금오산으로 올랐다가 용장골로 내려가는 코스입니다. 경주 남산 답사 코스 중에 하나만 꼽자면 당연히 여기가 제일입니다.
문화재가 가장 많이 있고 등산도 겸하면서 걷기와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글의 순서 |
1. 오는 방법 2. 준비물 3. 답사 코스 4. 마무리 |
1. 오는 방법
차를 가지고 오시면 네비에 서남산공영주차장이라고 치면 됩니다. 주차장이 넓어 주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며, 주차비도 삽니다.
대중교통은 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에서 내남행 버스를 탑니다. 삼릉에서 하차합니다.
2. 준비물
삼릉에서 금오산을 거쳐 용장으로 내려오는데는 약 6~7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체력을 잘 안배해야 하며, 너무 늦으면 내려오는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도록 합니다.
코스 중에 화장실은 한 곳-금오산 정상 아래에 위치-입니다. 점심식사와 충분한 물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등산스틱이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출발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바둑바위나 금오산 정상에서 점심식사를 하면 됩니다.
출발은 2군데입니다. 삼릉공영주차장에 차를 두고 금오산-용장골로 내려와서 용장리에서 삼릉까지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습니다. 차가 2대라면 한 대를 용장공영주차장에 세워두면 움직이기가 제일 편합니다.
두 번째는 삼불사 주차장에 두고 삼불사-삼릉-금오산-용장골로 내려오는 겁니다. 삼불사 주차장은 무료이긴 하지만 좁아서 휴일에는 자리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삼불사 입구에 있는 화장실을 우측으로 끼고 난 길을 가면 10분이면 삼릉에 도착합니다.
삼불사에서도 금오산으로 올라가는 등산코스가 있습니다. 답사가 목적이라면 삼릉계곡에서 출발하는게 맞습니다. 삼불사에 있는 배리삼존불은 돌아가시는 길-오후에는 차가 빠집니다.-에 보는 것으로 제외하겠습니다.
3. 답사 코스
경주 남산연구소에서 만든 지도입니다. 서남산공영주차장에 도착하면 연구소가 있습니다. 답사에 필요한 지도와 엽서가 있습니다.
삼릉-냉곡석조여래좌상-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삼릉계곡선각육존불-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삼릉계석조여래좌상-바둑바위-삼릉계마애여래좌상-금오산-용장계곡3층석탑-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용장사곡석조여래좌상-용장사터-용장리로 하산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면 삼릉탐방지원센터가 있습니다. 여기를 지나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빠지는 곳이 여럿 있습니다. 마음이 가는대로 한 곳으로 들어서면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한 배병우씨의 모델들인 소나무 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답사지인 삼릉이 있습니다.
오른쪽 부터 신라 8대 아달라, 제 53대 신덕왕, 제 54대 경명왕의 능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 합니다. 능의 형식은 둥근 흙무덤이며 표식물은 하나도 없고 상석(무덤 앞에 놓는 넓은 돌)이 있으나 최근에 설치한 것입니다.
삼릉을 오른쪽으로 끼고 위로 들어서다 처음 만나게 되는 불상입니다.
부근에 묻혔던 것을 파내어 지금의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도 불상이 넘어지면서 머리부분부터 떨여졌기 때문에 머리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어떤이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랬다고 하고, 도 어떤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짓이라 합니다만 그냥 떠도는 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왼쪽 어깨의 가사 끈과 허리에 맨 군삼(바지)끈이 매듭지어져 있고, 머리가 없어지고 손이 떨어져 나가 정확한 명칭을 말하기 어렵지만 여래(부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불상을 마주보고 왼편으로 난 길을 다라 5분 쯤 올라가면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이 있습니다.
보살상의 높이는 1.54미터이고 양 팔굽 너비가 0.45미터로 우리나라 소년 소녀들의 키에 해당되는데 이 불상 뒤에는 기름한 바위가 비스듬이 높게 솟아 있어 하늘과의 연결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풍만한 얼굴에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정병을 들고 있으며, 머리에 쓴 보관에는 화불을 배치하여 관세음 보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바위색으로 연지를 바른듯한 입술이 매력적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여래의 사랑을 받들어 세상을 제도하는 분입니다. 정성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청하면 곧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신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믿는 사람은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그를 태우지 못하고 깊은 물 속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얕은 곳이 찾아진다고 합니다.
다시 내려와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선각6존불로 가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큰 바위에 동쪽에는 선각으로 석가 삼존상을 새겼고 서쪽 면에는 아미타 삼존상을 새겼습니다. 석가 여래상은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여 설법하시는 모습이며, 머리 위에 둥근 원으로 두광(머리에서 나는 빛)을 표현하였고, 협시(脇侍)보살로 왼쪽에 문수보살, 오른쪽에 보현보살이 역시 연꽃 위에 서 있습니다.
서쪽 암벽에 새겨진 아미타 부처님은 석가 삼존과는 반대로 연꽃 위에 서 있고 신광(몸에서 나는 빛)은 없고 두광만 있습니다. 왼쪽의 관음보살은 여래 쪽으로 향해 윤왕좌(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 법)로 앉아 꽃쟁반을 들었고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관음보살의 반대의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서쪽 암벽을 보고 왼편으로 올라가면 홈을 파서 빗물이 바위 면을 적시지 않게 물길을 돌려놓았으며 또 기둥을 세웠던 흔적도 있는 것으로 보아 시설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빗물홈이 있는 곳에서 바위를 타고 곧장 위로 올라가면 마애불(선각여래좌상)을 먼저 만나게 되고, 등산로로 복귀하여 올라가다 안내도를 따라가면 석조여래좌상을 먼저 보고 마애불로 갔다가 다시 회귀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등산로를 따라 가는 것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삼릉계석조여래좌상은 등산로에서 계곡 건너편 높이 앉아 있습니다. 중대석엔 안상(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새겼고 화려한 보상화문으로 상대를 장식한 화려한 모습의 연화 대좌에 앉아 있습니다.
부처님의 상호는 깨어져서 윗부분만 남아 있었으나 얼굴을 수리하느라 시멘트를 발라 놓은 것이 오히려 추한 얼굴을 만들어 놓았다가 2007년에 새로이 복원을 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불꽃 무늬와 넝쿨 등으로 장식된 광배는 남산에서뿐만 아니라 신라 시대의 광배 중에서도 보기 어려운 걸작품이었습니다. 1960년경까지만 해도 윗부분이 조금 상한 채로 불상 뒤에 서 있었으나, 관광객이 넘어뜨려 부서진 채로 방치되었다가 복원을 하였습니다.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은 삼릉계석조여래좌상 위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m 쯤 가면 있습니다.
넓은 암벽은 중앙에 금이 갔는데 그 금을 대좌로 삼고 여래 좌상이 새겨져 있는데 몸체는 선각으로 얼굴은 윤곽을 내어 돋을 새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두 눈 사이가 아주 가깝고 코는 길며 입술은 두껍고 커서 균형 잡힌 얼굴이 아니라 고려 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입니다.
다시 삼릉계석조여래좌상을 지나고 상선암으로 올라가는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멀리 왼편으로 마애불-안내판이 아니면 잘 보이지도 않지만-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상선암까지는 체력싸움입니다. 천천히 쉬엄쉬엄 가다보면 상선암에 도착하고, 다시 등산로를 다라 올라가면 바둑바위에 도착합니다. 본래는 산선암에서 마애불로 길이 있어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으나 길을 보수하기 위해 막았습니다.
바둑바위에서는 경주와 내남들,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바둑바위에서 내려오면 상사암입니다.
상선암에서 바로 위로 보이는 바위가 상사암입니다.
「동경잡기」에
“상사 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일백 열발이나 되는데 그 생김새가 가파르고 솟아 있어 휘어잡고 오를 수가 없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은 이 바위에 빌면 병이 낫는다.”
“금오산에 산아당이 있는데 아기 낳는 모습을 돌에 새겨 놓았다. 신라 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칼자국과 가위 자국이 남아 있다.”라고 전하고 있다.
상사암은 높이가 약 13m, 길이가 25m 가량 되는 큰 바위인데 동쪽 면에 감실을 파고 촛불을 밝힌 흔적이 있습다.
상사암에서 아래로 삼릉계마애여래좌상이 보입니다.
남산에 있는 좌불(앉은 모습의 불상) 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높이 5.2m, 무릎 폭 3.5m입니다. 얼굴과 어깨는 높은 돋을 새김으로 옷주름과 손과 발은 선각으로 조각하였습니다.
금오산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금오산 정상에서 다시 갈림길로 내려와서 오른쪽으로 가면임도가 나오고 화장실이 있습니다.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다-이제부터는 내막입니다.- 보면 통일전으로 가는 길과 용장사터로 가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용장사곡3층석탑은 거대한 자연석을 자연석을 하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 기단을 쌓아 탑신과 옥개를 얹어 3층탑을 이루고 있습니다.
높은 봉우리를 기단으로 삼은 것으로 볼 때 수미산에 닿으려는 신라인의 여망을 잘 나타낸 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니 내려가는 길에 꼭 올려다 보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은 넓게 핀 연꽃 위에 촉지항마인상을 하고 결가부좌한 석가여래상이며 반달 같은 눈썹과 긴 코,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시대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두광과 신광이 소박하게 표현되었고 유난히 잘다란 옷주름이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옷주름은 인도의 마투라 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짐작되며, 불상 옆에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해독하지 못합니다.
용장사지석조여래좌상은 북 모양으로 생긴 기둥돌 세 개와 쟁반 모양으로 된 둥글고 넓은 반석을 사이사이 서로 바꾸어 3층으로 쌓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부처님을 모셔 놓았습니다.
아깝게도 부처님은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 없으나 통견의 가사깃 사이로 승기지가 비스듬히 가슴을 가리고 동여맨 옷끈이 맵시 있게 매어져 있습니다. 제일 특이한 것은 왼쪽 어깨에 드리어진 영총의 수실인데 신라의 불상에서는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어 스님상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이 또한 스님이 연꽃 대좌에 앉는 경우가 없어 의심이 가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삼국유사에 당시 주지인 대현 스님께서 이 미륵상을 돌며 염불을 하면 돌미륵상도 스님을 따라 머리를 돌렸다는 기록이 있어 미륵불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용장사는 지금은 절터만 남아 쓸쓸함을 주고 있지만 김시습이 승려가 된 후 거주하면서 금오신화를 저술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깁시습이 용장사에 있면서도 영월에 있는 단종을 잊지 못하여 뜰에 핀 꽃을 보며 슬퍼하였다고 하여 그 꽃을 북향화라 하였는데 용장사 부근에 많이 피었다고 합니다.
신라 대현 스님으로부터 조선 설잠(김시습)까지 오랫동안 번창하였던 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터에서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걸친 기와와 그릇의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고, 특히 용장사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절 중의 하나입니다.
3. 마무리
용장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용장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버스를 타고 삼릉이나 시내까지 가면 됩니다. 식사는 삼릉에서 칼국수-고향칼국수집이 유명합니다-를 먹거나 경주 시내로 들어가면 됩니다.
<위 사진들의 대부분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제 글 중에 먹거리도 소개되어 있으니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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