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천안박물관

천안박물관_거창군

그저 물처럼 2018. 6. 2. 11:16
반응형

거창은 천안에서 2시간 30분거리란다.

멀다. 경주에서도 88고속도로(지금은 광주대구고속도로) 가야해서 주말엔 정체가 심해 머뭇거리다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답사를 3번-한번은 천안이라, 2번째는 경주라(여기는 옛 근거지다.), 그 다음은 개인사정으로-이나 참석을 못했다. 그럼에도 여러분께서 촌놈을 기억해 주신다. "오랜만에 오셨네요"라고

휴게소에서 한번 쉬고는 거창에 도착한다.

 

1. 일시: 2018년 5월 29일(화) 07:30~19:00

2. 코스: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 상림리 석조보살입상 - 중식 - 구연서원, 수승대, 요수정 - 동계정은고택 - 가섭암지마애삼존불

 

양평리 석조여래입상(보물 377호)

큰 길에 차를 세우고 걷는다. 날씨는 여름 수준이다. 그나마 가는 길에 꽃들이 있어 눈이 즐거우니 발길이 가볍다. 

불상은 신라후기(나는 통일신라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영토적으로 대동강 이북지방을 잃어버린 시기였고, 고구려 유민들도 대부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양식을 따랐다. 후기로 갈수록 균형미가 떨어지는데 비하여 좁은 어깨(조각가 능력이라기 보다는 아마 돌의 규모 문제 였을 듯)를 제외하면 얼굴의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옷주름도 사실적이다. 손모습(수인)으로는 어떤 불상인지 알기가 어려우나 이 지역에서는 동쪽에 있어 약사여래불로 추정하기도 한다더라.

천개(天蓋)*는 나중에 올린 것으로 보이고, 대좌도 규모에 맞지 않다. 주위에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을 세웠을 것이다.

 

 

*천개: 원래 햇빛이나 비를 막기 위한 우산에서 출발하였다. 인도에서 따가운 햋빛을 피하기 위해, 귀인의 행렬이 사용하였던 것이 점차 불보살상의 머리 위나 사원의 천장을 장식하는 장식물로 변했다. 법당에서도 많이 보인다.(부석사 무량수전)

 

상림리 석조보살입상(보물 378호)

해설사가 처음으로 "여기가 아닌게벼"라 한다. 가던길 다시 돌아서고 기웃거리길 여러번에 만났다. 찾기 어려운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헤맨 것은 표지판이 제대로 없어서이다.

한 눈에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보살은 여래와 다르게  보관, 목걸이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보관은 없고 상투머리만 남아 있으며 목에는 아름다운 목걸이를 둘렀다. 얼굴이 길고 코가 손상되었고 처진 입꼬리 때문에 우울해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아 당연히 고려시대 이후에 조각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아닐까?

왼손에 연꽃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었기에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점심- 오늘도 류선생께서 복분자를 가져 오셨다. 빨간 색이 입맛을 돋군다. 식당은 제법 유명한 집인 듯하다. 해설사 분과 잘 아는듯 오는 길에 사과 한상자를 차에 올려줘 후식까지 먹게 되었다. 한우로 유명하다는데 우리는 전골을 먹어 평가하기는 그렇다. 식당 이름은 '외양간 구시' 구시란 여물통의 사투리.

 

수승대

이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조선 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든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신권(樂水 愼權)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

다음백과에서 가져옴

 

 

 

 

 

구연서원으로 들어가는 관수루는 앞보다는 자연스러운 기둥을 사용해서인지 뒤태가 더 좋다. 관수루는 올라가는 계단이 없고 옆에 있는 바위를 이용해서 올라야 한다. 이 바위도 거북바위라 하는데 장수(長壽)와 연관이 있을 듯하다.

 

 

우기가 아니라 물이 적어 계곡의 참맛을 보지는 못했으나 여름의 절경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 요수정(樂水亭)에 오르니 나무들이 앞을 가린다.

 

수승대를 떠나 동계 정온 고택으로 간다. 안채에는 거주하시는 분이 계셔서 출입을 못하고, 사랑채는 수리중이다. 항상 가옥에는 관심이 없었던터라 그저 가만히 있다 제일 먼저 문을 나섰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강직한 사대부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시류를 잘못 읽은 것은 이 분만이 아닌 것은 오직 명분에 충실한 성리학자였기 때문일까?

 

가섭암지마애삼존불(보물 530호)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금원산 자연휴양림에 있는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이다. 주차장에서 계곡을 건너기도 하면서 제법 걷는다. 숲이 주는 그 무엇에 감사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느릿느릿 올라가보자. 얕은 여울에 무심히 놓인 돌다리를 건너는 맛도 제법이다. 숨이 가빠질 쯤에 문바위가 나타난다. 왜 이 큰바위에는 불상을 조각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서서 좁은 계단을 오르면 마애삼존불이 있는 바위굴에 다다른다.

 

 

바위에 물홈을 삿갓모양으로 파고 그 아래에 불상 셋을 조각하였다. 얕은 돋을새김으로 살짝살짝 새겨 놓은 불상과는 달리 광배는 테두리만 남기고 안쪽으로 파 내었다.

둥굴넙적한 얼굴에는 그림그리기가 서툰 이가 다른 곳에서 눈, 코, 입을 가져다 무심히 툭 던져 놓은 듯하다. 옷주름도 도식적이고 더욱이 짧은 옷자락은 개울물을 건너는 폼새로 품위가 떨어진다. 좌우 협시보살의 얼굴도 여래와 크게 다르지  않고 대좌는 언뜻 화려해 보이나 번잡스럽다.

그렇지만 석굴암의 본존불에서와 같이 위엄있는 모습은 우리들을 기죽게 하지만, 이 불상은 길에서 만나는 다양군 군상을 보는듯 자연스러워 한참을 보아도 지겹지가 않다. 

본존의 대좌가 凸형 위에 불꽃이 조각되어 있는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왼쪽 사각형 안에 남았는 기록에 의하면 고려 예종 때(12세기 초)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조성되었다 한다. 수인의 모습이나 조성 경위로 볼 때 아미타여래로 추정된다.

 

 

반응형

'문화재 답사 > 천안박물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원_영월군  (0) 2019.12.03
천안 박물관_음성군 등  (0) 2018.09.08
천안박물관_옥천과 영동  (0) 2018.04.30
천안박물관_창덕궁과 서오릉  (0) 2018.04.23
천안박물관_파주시  (0) 2018.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