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서예비엔날레가 열렸다. 겸사겸사로 주위 문화재를 검색하다보니 완주군을 빼놓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11월 05일(화) 아내의 도자기 수업이 끝나자마자 전주로 향했다.
글씨를 배운지 2년이 채 안되어 그 맛을 알지는 못해 보는둥 마는둥하고는 시내 한옥 - 하늘마루 - 에 짐을 풀었다. 평일이라 쥔장께서 방을 업글해 주셔서 기분이 한층 달아 올랐다.
06일(수) 아침에 오래 전 기억보다 규모가 커진 삼백집 본점-맛이야 당연하고, 주차장도 있으니 평일에는 이용하기 좋겠더라. - 에서 국밥을 먹었다.
완주의 정수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淨水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은 2015년에 보물 185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조각라고 일컬어지는 무염의 작품이다.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중앙의 아미타여래는 네모의 얼굴이 통통하여 살집이 있다. 코는 날씬하며 입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좌우의 보살은 손모습을 제외하고는 비슷하다. 얼굴은 아미타여래와 마찬가지로 사각의 형태에 살집이 토통하다. 보관은 화려하고, 보발은 양 어깨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옷주름은 간략화되었으나, 모습이 역동이며 조선 후기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완주 송광사는 평지 가람이다.
봄과 여름에는 벚꽃과 연이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은행잎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여러번의 폐찰과 중건을 거쳐 지금의 모습은 조선 인조(1636) 때였다. 일주문은 현재 위치에서 3km - 한 때 위세가 대단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게다. - 떨어져 있었는데 일제감점기에 지금의 자리에 앉았단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처마의 조각이 화려하고 , 일주문에서 쪼그려 앉으면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기본적인 우리나라 가람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금강문을 지나 이르면 사천왕이 우리를 맞이한다. 보물 1255호인 소조사천왕상 - 흙으로 만든 - 이다. 광목천왕에 있는 기록에 의해 조성 연대 - 조선 인조(1649). 보탑은 후에(정조 때) - 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상세한 것은 [문화재 사전]에서 확인하자.
완주 송광사의 사천왕은 최명희가 "혼불"에서 말하는 이야기처럼 입모양이 다 다르다. 활짝 웃고 있거나 꽉 다물고 있거나, 토끼처럼 이빨 2개만 보이거나, 윗니만 드러내고도 있다.
4m의 웅장하고도 균형감이 뛰어나며, 이마의 주름과 튀어나온 눈두덩과 같이 얼굴의 표정이 생생한 것이 흙으로 만든 장인에게 찬사를 보낼 밖에....
천왕문을 나서면 왼쪽에 보물 1244호인 종루(鐘樓)가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한 십자각(十字閣)의 건물에 처마장식이 화려하다 못해 현란하다. 균열때문에 타종이 불가능한 범종은 바닥에 앉았다.
다음은 송광사 대웅전(보물 1243호)이다. 팔작지붕에 다포계 처마이며, 활주가 있는 평범한 조선후기의 건물이다. 중앙 계단의 석물이 눈길은 끈다.
독특하게도 금당의 중앙은 '대웅전'이고, 좌우에는 "유리광전'과 '무량수전' 편액이 - 최근에 올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 있다. 이것은 법당에 석가여래, 약사여래과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음을 말해 준다. 또 왕, 왕비, 세자의 축원을 비는 삼전패(三殿牌)가 있다.
이 건물의 진가는 법당 안에 있다. 안에는 4개의 기둥이 있는데 뒤쪽으로 배치하였고, 불상 또한 거대하여 내부는 좁아 보인다. 천장에는 용조각을 비롯하여 물고기, 거북 등이 있고, 빗천장에는 주악비천도가 있어 천장 전체가 천개처럼 보인다. 고개를 들고 한참을 본다. 법당에서 기도하시는 분이 안계시면 목이 아파도 좋겠다.
역시 예향이라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금당 밖에 벽에 주악비천을 확대하여 - 귀차니즘 분들은 이것만 봐도 되겠지만 진품을 두고 그래야 할까? - 놓았다.
송광사에서 위봉산성을 거쳐 위봉사로 간다. 지금은 벗나무가 잎을 떨구고 있었으나 봄에는 꽃놀이하기에 좋겠다.
높고 가파른 계단 위에 일주문이 있다. 편액에는 추줄산이라고 되어 있다.
숙종 때 경기전을 보호할 목적으로 위봉산성과 행궁을 건축하면서 위봉사를 중건하였다. 한 때는 금산사와 송광사를 말사로 거느리기도 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암막새에 1673년(현종)의 글씨가 있어 그 이전에 중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헌종(1838)에는 중수하면서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보광명전은 보물 608로 지정된 조선중기 다포계 건물이다. 처마를 활주가 받치고 있다.
간단히 건물만 둘러보고는 화암사로 향한다. 주차장에서 걸어가야 하는걸 모르고 차롤 몰고 올라 간다. 만약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있었다면 고생했으리라. 길은 가파르고 굴곡도 심하다. 직접 올라가보지 못했으나 걸어가는게 좋을듯하다.
주차를 하니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다. 남도 어느 절집처럼 높이 앉았다.
대부분의 절집 창건에는 의상과 원효가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함께 납신다. 걸어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맞이 했다면 더욱 느낌이 좋았을법한(?) - 걸어서 올라가 보시라 - 우화루가 있다. 2층의 누각 건물(보물 662호)이다. 당연히 오래 보전할라치면 단청을 해야 하지만 범인의 눈에는 날것 그대로의 나무 속살이 더 정겹다.
안도현 시인이 말한 '잘 늙은 절'이라는 말이 확 다가온다.
옆 계단을 올라서면 산 깊은 곳이라 좁은 자리에 앉아 다소 답답해 보이는 마당이 나타난다. 그기에 극락보전이 앉았다.
국보 316호. 당연히 이름에 걸맞는 사연이 있는 법이다. 그림부터 먼저보자.
맞배지붕에 3칸의 아담한 집이다. 주춧돌과 기둥 - 민흘림이다. - 이 중생들에게 평온하고 친절하게 다가온다. 다만 나지막한 기단이 부처님의 거처이니 옷깃을 가다듬어라하는 듯하다.
이 건물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하앙(下昻) 구조다.
절집의 지붕을 크게해서 위엄있게 보이려면 웅장해야 하는데 문제는 무겁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둥위에 공포를 잘 조직해서 하중을 분산하는데 '하앙구조'는 지붕과 같은 방향으로 기둥을 넣은 것인데 이것이 하앙구조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다수가 보이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귀하게 보이는바 그래서 국보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싶다.
후면에는 다듬지 않고 그냥그대로이다.
법당 안은 섬세, 정교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다. 닫집에는 용과 봉황,비천이 세월을 이겨내고 아직도 장엄하다. 복잡한듯하나 화려하고 경건함을 갖게 한다.
그리고 바깥 처마 하앙 아래에는 비천주악상이 있다. 비록 색이 퇴색되었지만 옷자락 등이 생동감이 넘친다.
한참을 넋을 잃고 보다가 돌아선다. 우화루라는 편액이 있고 사물 중에 목어만 걸려있다.
대둔산 자락에 앉은 안심사(安心寺) 금강계단(보물 1434호)에는 석가의 옷과 치아가 봉안되어 있단다. 아담하게 만든 기단위에 사리탑이 있고 네 귀퉁이에 신장상이 있다.
이 사찰의 스님은 과연 적멸보궁이라고 믿는 걸까?대웅전과 적광전의 건물에 비해 적멸보궁이라는 간판(?)이 있는 건물은 가건물이다. 통도사의 그것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기단 면석의 조각수법이나 신장상이 보물로 지정되는데 기여했을뿐일까?주위에 흩어져 있는 석물들을 보면 한 때는 대단한 위용의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일주문 바로 옆 부도군도 그 위용을 증명해 주는 듯하다. 가을빛이 한줌 더해지니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발길을 붙잡는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천안으로 오는순서대로 나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