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불교 문화재

강원 양양_선림원터

그저 물처럼 2019. 4. 1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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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터

진전사에서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지역이 같아서 항상 같이 방문하게 되는 곳이다. 경주에 살 때라 한번 오기도 힘들었거니와 선림원터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때가 마침 겨울이고 눈이라도 있을 때는 감회가 남달랐던 기억이 있다.

한 때는 구절양장 九折羊腸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의 길이었지만 지금은 포장이 되고 난 뒤 팬션 등의 난개발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번에 가니 미천령자연휴양림 매표소가 아래로 내려왔다. 답사만 한다는데도 입장료와 주차료를 내야 한단다. 불합리하다고 생각이 되지만 그리해야 한다는데 어쩌랴. 세상 모두가 돈세상인걸.

매표소 전에 주차를 하면 주차비라도 절약할 수 있겠지만 비기 와서 차로 가기로 한다.

원터는 좁은 골짜기에 있어 주차하기에 적당치 않다. 매표소에서  500m 걸어서 가보자. 계곡 물소리가 반겨주니.

깊은 산중에 집을 짓고 선림원 禪林院이라 이름하였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순응법사가 창건하였다한다.(804년-여기서 발굴된 범종을 월정사에 보관하다 한국전쟁 때 불탔는데 명문에 기록되어 있었다 한다.) 이후 홍각선사가 중수(9C 중엽)했으니 이 때부터  선종 불교로서 - 선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  출발했을 것으로 보면 될까?

원터에사 발국되는 유물들 중에  9세기말  이후의 것은 없다하니 9세기 말 즈음 어떤 일 -홍수나 산사태 등-에 의해 매몰이 되고 잊혀졌다가 현대에 들어 우리에게 왔다.

한끼 쌀 씻은 물이 하천에 하얗게 흘러 미천골이라 했다는데 이 정도의 터에 승려가 몇 명이나 살았을까? 뒤에 호사가들이 제멋대로 해석한 것이 분명하다.

현재 이 곳에는 4기의 유물이 있고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444호~7호)

 

아내와 호젓이 우산쓰고 좁은 계단을 오른다. 괴불주머니가 축대에 계단 한켠에 다소곳이 서 있다.

 

 

 마침 발굴 중이었다.  비가림막과 중장비, 컨테이너가 시선을 어지럽힌다.

제일 먼저 탑이 우리를 맞이한다. 기단에 8부중상을 조각되어 있는 단아한 신라양식의 탑이다. 협소한 면적 때문인지  작은 금당터가 있고 강당터는 보이지 않는다.

 

여러 장의 돌로 탑의 토대를 만들고,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둘로 나눈 뒤 8부중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체감되고 각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고,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 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있고, 철제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보주(寶柱: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모양의 돌이 있으나 원형이 아닌 듯하다.
외형상 정제된 비례를 보여주지만 8부중상의 조각은 섬약하고 석재의 구성도 규율성을 잃고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나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복원공사가 진행되기 전 기단부에서 소탑(小塔) 60여 기와 동탁(銅鐸) 1개가 발견된 일이 있다. 탑 앞에는 안상(眼象)을 새긴 배례석(拜禮石)이 남아 있다.<문화재청>

 

 

 

 

이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완전히 파손되었던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기단부(基壇部)만이 남아있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승탑임을 알 수 있는데, 신라 때에 돌로 만든 승탑은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중간받침돌·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의 조각수법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기단의 위아래를 마무리하는 수법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승탑으로, 기단 아래받침돌 밑을 크게 강조한 것은 8각형의 일반적인 승탑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승탑의 건립시기는 절터에 남아있는 홍각선사비와 이 승탑이 홍각선사의 승탑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 정강왕 1년(886)인 것으로 볼 수 있다
.

<문화재청>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8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경사진 면은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운데, 귀꽃조각과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다.
지붕돌이 일부 탈락되긴 하였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으로 흐른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1호)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같은 절터내의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보물 제446호)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문화재청>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이다. 선림원터에 있으며,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龜趺)와 비몸, 비머리돌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있다.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비받침의 거북은 목을 곧추세운 용의 머리모양으로 바뀌어있고,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다. 등에 붙어 있는 네모난 돌은 비몸을 세우는 자리로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비머리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경서에 해박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비문은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다른 곳에서 모아 새긴 것인데 신라 후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문화재청>

 

 

본래는 비신이 없었다. 비신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복원을 한것을 보면 비신의 탁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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