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마애삼존불을 보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당진 안국사지다. 보슬비에 물든 단풍이 아주 예쁘더라.
안국사지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100호)
내용이 길지만 읽어볼만 하다. Daum에 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안국사지 경내에 있다.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무릎 아랫부분이 매몰되어 있었으나 2004년 충청남도역사문화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불상의 발과 대좌가 모두 확인되었다.
중앙의 본존불상은 머리와 신체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대형 석불입상이다. 머리 위에는 화불이 장식된 보관을 착용하고 있으며 보관 위에 방형의 보개가 있다. 본존불상의 이마에는 백호가 있는데 백호 위에 또 다른 원형의 구멍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상호는 턱 부분에 약간 살이 올라있으며 눈·코·입 등이 얼굴 중앙에 몰려 있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흘러내렸고 목은 짧으며 삼도는 없다.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댄 채 복부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붙이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가슴에 대고 있다. 본존불상의 발부분은 별도의 석재에 발가락을 표현하여 조성하였다. 발의 길이는 40㎝이며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발과 유사한 상자 모양이다. 본존불상의 대좌는 3m가 넘는 자연 암반의 상면에 방형의 대좌를 선각의 방식으로 조성하였다.
우협시 보살상은 머리에 인동당초문 형태의 초문(草紋)이 장식된 비교적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이마와 보관 사이에는 반원형의 머리카락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상호는 눈·코·입 등이 오밀조밀하게 표현되어 얼굴 중앙에 몰려 있다. 귀는 긴 편이며 귀 가운데를 한 가닥의 보발이 가로질러 귓불 부분으로 내려오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삼도의 아랫부분에는 목걸이 장식이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양 팔뚝에 팔찌(腕釧)가 새겨져 있다. 수인은 양손 모두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채 오른손은 가슴 부분에 부착하고 있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다. 우협시 보살상의 대좌는 원형이며 대좌 상면에는 발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의 지름은 130㎝, 두께는 33㎝이다.
좌협시 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있으며 현재 파손된 보관만이 몸통 위에 놓여 있다. 좌협시 보살상의 복부에는 리본 형태의 띠 매듭이 새겨져 있다. 좌협시 보살상의 모습은 수인의 손 위치가 다른 것 외에는 전체적으로 우협시 보살상과 동일한 모습이다. 좌협시 보살상의 대좌는 평면 방형이며 대좌의 크기는 90㎝, 두께는 43m이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기와와 막새기와를 통해 조성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2004년 실시된 발굴조사에서는 ‘태평십(太平十)’명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발굴단은 이 시기를 요(遼)의 성종(1021~1030) 연간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태평십’은 1030년(현종 21)임을 밝혔다. 안국사지에서는 막새 기와가 단일 종류의 것만이 출토되고 있어 ‘태평십’명 기와를 안국사 창건기의 기와로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여겨진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에서 주목되는 형식적 특징은 본존불상이 방형의 보개를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는 고려 광종대 조성된 불상에서 처음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안성 매산리 석조보살입상,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을 들 수 있다.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를 착용하고 있는 불상의 조성 배경은 ‘황즉불(皇卽佛)’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경우 광종대 조성된 면류관 형태의 방형 보개를 착용한 불상보다 형식화되어있는데, 불상이 제작된 11세기 전반에도 고려는 여전히 황제국 체제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조성 배경에도 ‘황즉불’사상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34540
당진 안국사지 석탑(보물 101호)
이건 문화재청의 자료를 그대로 옮겼다.
안국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안국사는 창건된 해가 분명하지 않고, 다만 절 안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곧 다시 폐사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100호)이 보존되어 있다.
탑은 아래부분인 기단부(基壇部)가 다른 탑들에 비해 간단하고, 2층 이상의 탑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포개져 있어 다소 엉성해 보인다. 탑신(塔身)은 유일하게 1층 몸돌만이 남아있는데, 각 귀퉁이에 기둥을 본떠 새기고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다른 3면에는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고 무거워 보이며, 처마 밑으로 깊숙히 들어가 4단의 지붕돌 밑면받침을 밖으로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잃고 있고 조각도 형식적이며, 1층 몸돌이 작아서 마치 기단과 지붕돌 사이에 끼워져 있는 듯 하여 우수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탑이다.
당진영탑사
영탑사는 들어가는 입구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 낙엽길의 운치를 더해준다.
넓은 마당을 두고 전각들이 배체되어 있고 왼쪽 산허리에 유리광전(약사불을 모신 전각)과 7층탑이 있다.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보물 409호)은 대웅전 옆 종무소를 겸하고 있는 전각에 모셔져 있다. 영탑사 편액이 걸려 있었다. 유리창 때문에 사진 찍기는 별로지만 촬영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문화재청의 자료에 의하면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唐津 靈塔寺 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은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영탑사에 모신 불상으로, 8각형의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三尊佛) 구도이다.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다. 사각형의 얼굴은 원만한 느낌을 주며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도식화되어 보인다. 상반신은 길고 큼직한 데 비하여 하반신이 무척 위축되어 있어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무릎 높이도 상반신에 비하여 낮아서 몸의 균형이 고르지 못하다. 가슴 역시 평면적이며 하반신 처리는 둔중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수법은 고려 중기 이후 나타나는 특징이다. 손은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모양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보살과 오른쪽 보살은 모두 같은 자세에 똑같은 수법을 하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은 따로 만든 것이며, 그 안에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길게 어깨까지 내려온다. 얼굴은 본존불과 기본적으로는 같으나 좀더 여성다우며, 가슴의 목걸이 장식은 유난히 크다. 잘록한 허리에 둘러진 천의(天衣)는 몇 가닥 띠로 허리를 잔뜩 졸라 맨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보살들의 대좌(臺座)는 본존불의 대좌에서 나온 두 개의 연꽃 줄기가 올라가서 만든 연꽃 봉오리이다.
이 금동불상은 구도와 형태 등에서 고려불상의 특유한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